신성한 직관
<신성한 직관이란 세상을 바라보는 특정한 관점>
사람은 모든 '신성한 직관'을 통해서 현실을 경험할 수 있지만 특히 한 가지 관점에 본능적으로 끌린다. 자신의 에니어그램 번호의 '신성한 직관'이 상징하는 시각으로 끌리는 것이다. 이카조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아홉 가지 '신성한 직관' 모두를 경험할 수 있게 태어나지만, 특정한 한 가지에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더 각별하게 맞춰져 있다.
우리는 삶을 이해하는 방식들 중에서 특히 어느 한 가지에 취약하고 영향을 잘 받는 상태로 지구상에 오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 영향을 끼치는 어떤 일이 발생한다. 그러고 나서 모든 사람에게 생후 몇 년 동안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자신의 본질적인 바탕과 점점 단절되면서 성격 구조를 발달시키는 것이다. '본질'과 단절되면서 우리는 자신의 '신성한 직관'이 나타내는 특정한 진실과도 연결이 끊어진다.
우리는 본질과 단절된 채로 현실을 인식하게 되므로 제한된 시각으로 현실을 해석하게 된다. 이 제한된 시각으로 현실을 해석하는 방식이 현실에 대한 고착화된 믿음, 즉 자기 에니어그램 번호 특유의 착각으로 변하는데, 이를 '집착(fixations)'이라고 한다. '집착'이 성격 발달의 토대를 우선 형성하고, 거기에 특유의 심적 경향, 감정 반응, 행동 패턴이 더해지면서 성격이 형성된다.
예를 들어, 에니어그램 1번 유형이라면 1번 유형의 '신성한 직관'인 '완전함, 선함, 올바름'으로 모든 것을 바라봐야 한다. 그런데 어린 시절에 본질적인 바탕과 단절됨으로써 1번 유형은 자신과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해주는 무언가와 단절됐다고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깊은 내면에서부터 자신과 자기 외부의 현실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확신이 올라온다. 그 결과, 1번의 집착이 잘못된 모든 것에 대한 분노라는 내면의 감정적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뭐든지 뜯어고쳐서 바르게 만들려는 행동패턴을 형성한다.
우리는 모두 한 가지 특정한 시각, 즉 에니어그램에서 자신의 번호에 해당하는 시각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도록 맞춰져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완전히 깨달음을 얻고 환경의 암흑화에서 벗어나도 우리는 자기 에니어그램 번호의 '신성한 직관'을 통해 현실을 인식할 것이다. 또 다른 번호보다 자기 번호의 깨달은 정서 상태(이것을 '덕목(virtue)'이라 한다)를 더욱 경험하고 구현하게 될 것이다. 깨어있는 상태든 잠든 상태든 자신의 유형은 여전히 똑같다.
성격의 에니어그램은 자아 또는 성격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 전체를 완전히 보여주는 지도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때부터 한 가지의 '신성한 직관'에 특별히 민감하고 그래서 특정한 에니어그램 유형을 갖긴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아홉 가지 유형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유형의 역학을 쉽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
<각 유형의 신성한 직관>
1유형: 신성한 완전(Holy Perfection)
- '신성한 완전'의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보면 현실 안에 본래부터 근원적인 올바름과 완전함이 있음을 깨닫는다. 이때의 '완전함'의 의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때 그것의 근원적인 본성이다. 행성, 나무, 사람 등 우주 안의 각 발현은 근원적인 본성의 연속이며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므로 그 근원적인 본성은 올바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2유형: 신성한 의지(Holy Will)
- 2유형의 신성한 직관은 '신성한 의지'와 '신성한 자유' 두 개 이름으로 불리운다. '신성한 의지'는 '신성한 법칙(3유형의 신성한 직관)'에 의해 움직이는 우주의 역동성 뒤의 힘, 그 타성 속에 방향성과 지능을 갖춘 힘에 초점을 맞춘다. 즉 우주의 활동 속에는 통합된 의지가 있다. 이는 유신론적 관점에서 말하는 '신의 의지'라고도 할 수 있다. '신성한 의지'의 측면에서 보면 우리 각자의 삶이 '신의 의지'의 발현이므로 우리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여지는 존재임을 안다. 따라서 우리 내면과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따를 때 자유롭다는 '신성한 자유'를 깨닫게 된다.
3유형: 신성한 법칙(Holy Law)
- 3유형의 신성한 직관 '신성한 법칙'은 '신성한 조화'와 '신성한 희망'으로도 볼 수 있다. '신성한 법칙'은 우주가 하나이며 통합된 실체이고 항상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다. 모든 발현이 단일체이며 우리 모두가 근본적으로 우주라는 하나의 몸을 이루는 각기 다른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는 진실 속에서, 3유형은 이 통일체가 항상 움직이며 정지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러한 '신성한 법칙'에 의해 드러나는 '실재'의 모든 발현은 조화롭게 상호작용을 이룬다. 이것이 '신성한 조화'이다. '신성한 법칙'과 '신성한 조화'를 깨달았을 때 우리는 '신성한 희망'을 보게 된다.
4유형: 신성한 근원(Holy Origin)
- '신성한 근원'을 물리적 차원에서 보자면, 모든 생명이 공통의 원천에서 비롯하며 똑같은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영(spirit)의 차원에서 '신성한 근원'은 우리 개개의 영혼이 생겨나는 '원천'이 '실재'임을 깨닫는다. 우리 모두는 유일무이한 영혼이지만 근원적으로 모두 '진정한 본성'의 영역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수준에서는 '실재'나 '진정한 본성'이 인간 영혼의 원천일 뿐 아니라 모든 발현체의 원천임을 알아본다.
5유형: 신성한 전지(Holy Omniscience)
- 5유형의 신성한 직관 또한 '신성한 직관'과 '신성한 투명성'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두 신성한 직관은 우주라는 통합체를 전체의 측면이 아니라 그 안의 다양한 발현의 측면으로 초점을 옮겨서 바라본다. 바꿔 말하면 이 시각에서는 현실을 하나의 사물로 보기보다 우주를 이루는 모든 부분의 상호연결성과 이 상호침투성이 내포하는 의미에 중점을 둔다. '신성한 전지'는 인간 존재의 목적이 신이 자신을 알기 위함이며, 우주 안에서 인간의 위치는 '절대자'의 투명한 창문이고, 내적 작업의 본질은 자신의 본성을 점진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임을 알려 준다. '신성한 투명성'은 우리가 자신을 '실재'의 투명한 창문으로 경험하면 자신이 나머지 창조물과 분리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6유형: 신성한 믿음(Holy Faith)
- 6유형의 신성한 직관인 '신성한 믿음'의 다른 이름은 '신성한 힘'이다. '신성한 힘'은 우리의 진정한 본성이 영원불멸하며 몸의 영고성쇠에 영향받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육체적 고통을 겪을 수는 있겠지만 심원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서 있으면 그것마저도 견딜 수 있다. 본질적인 바탕을 이해하면, 그것을 모른다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일도 꿋꿋이 견딜 수 있게 해 준다. '신성한 믿음'은 우리 내면의 본성이 '본질'이라는 인식에 대한 믿음이다. 다시 말해 '본질'이 우리의 본성이며 그것이 사실이라는 흔들림 없는 확신을 말한다.
7유형: 신성한 계획(Holy Plan)
- 7유형의 신성한 직관인 '신성한 계획'에도 다른 이름들이 있다. '신성한 작업', '신성한 지혜'이다. 7유형의 신성한 직관에서 가장 중요한 초점은 역동성의 본성, 그것과 연관해 시간이란 무엇인지, '실재'의 움직임의 특성과 조화되는 방식으로 삶을 살고 개인의 성장을 추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있다. 따라서 '신성한 지혜'는 자아가 사라진 삶에서 나오는 지혜이며 '신성한 작업'과 '신성한 계획'이 가리키는 현실의 이해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때만 발달할 수 있다. '신성한 작업'은 정신적 차원에서부터 물질적 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발현이 '실재'의 작품이며 신의 '신성한 작업'이라는 이해이다. '신성한 계획'은 현실의 전개가 임의적이거나 무질서하지 않고 우주 본래 지능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8유형: 신성한 진실(Holy Truth)
- '신성한 진실'이란 우리의 근원적인 본성이 '실재'이며, 그것은 우리 몸과 영혼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인지이다. 즉 우주 전체가 나뉠 수 없는 하나이고 그것의 모든 측면이 동시적으로 드러나며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통찰이다. 8번의 시각에서 깨달음이란 이원성, 즉 이것과 저것, 나와 타인, 물질과 '정신', 자아와 '본질'을 구별하는 관념을 넘어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며 만물이 단일하다는 현실에 눈을 뜨는 것이다.
9유형: 신성한 사랑(Holy Love)
- '신성한 사랑'은, '실재'가 사랑의 근원이자 사랑 자체이며 모든 존재가 그 사랑의 발현이고 구현이라는 사실이다.즉 모든 창조의 근원적인 본성이 이롭고 호의적이라는 뜻이다.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신성한 완벽'은 현실의 근원적 '그러함(suchness)'을 설명하고, '신성한 사랑'은 현실이 사랑으로 만들어졌으며 사랑의 발현임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신성한 근원'은 우리가 '실재'에서 생겨나고 그것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며, '신성한 믿음'은 '실재'가 우리와 모든 생명을 지원하고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해준다. '신성한 법칙'과 '신성한 의지' 그리고 '신성한 계획'은 '실재'의 활동의 다양한 의미를 표현한다. '신성한 진실'은 '실재'가 존재하며 그것이 모든 현실에서 다차원에 걸쳐 동시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지적한다.
결코 이해하기 쉬운 내용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잠시 잊고 있었던, 그래서 누구나 깨닫고 회복해야 할 우리 각자 삶의 의미와 본질이 아닐까 한다.
-참고 <에니어그램의 영적인 지혜>